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진화론은 다윈이 세운 것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가장 먼저 진화론을 주장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B.C. 610~545)이다. 19세기에도 다윈이 새삼스레 진화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진화 자체는 관찰하기 어려운 현상이 아니다. 간단히 개만 보더라도 생물종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늑대에 가깝게 생겼던 개가 푸들에서부터 세인트버나드까지 다양한 종류로 분화되는 데는 길어야 몇 만 년 짧으면 몇 천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진화의 원동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라마르크는 "용-불용설" 즉 쓰는 것, 용(用)은 진화하고, 안 쓰는 것, 불용(不用)은 퇴화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반면 다윈은 자연선택설을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 살아남은 생물이 자기를 닮은 자식을 낳는 방식으로 특정한 형질이 확산된다고 본 것이다.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용불용설은 폐기되었고, 자연선택이 진화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선택은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지만 반대로 또 생각보다 약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AB형과 O형은 절대로 O형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왜냐하면 A형이나 B형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우성이고, O형 유전자가 열성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성, 열성은 우수하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한 쌍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유전자가 발현되느냐 하는 것을 말할 뿐이다. 요컨대 A와 O를 가지고 있으면 A가 발현된다.

만약에 A형과 O형만 사는 나라에 O형만 걸리는 전염병이 수 백 년간 발생하면 당연히 O형은 급속도로 줄어들 것이다. 이 병이 O형을 5명 중 1명 꼴로 죽이기만 해도 불과 몇 세대면 O형은 거의 사라지고 만다. 여기까진 자연선택이 무척 빠르다.

그런데 수 백 세대가 더 지나도 O형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O형은 O와 O가 만나기 전까진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한쪽 부모에게서 O형 유전자를 물려받더라도 다른 부모에게 A형 유전자를 물려받으면 혈액형은 A형이기 때문에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 이 사람은 자식에게 O형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연선택에 의해 도처에 A형이 널려있으므로 O형을 두 개 물려받을 가능성도 매우 희박해진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거의 모두 A형일지라도 O형 유전자는 계속 전해지게 된다. 여러 종류의 치명적인 유전병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반대로 A형만 걸리는 전염병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A형 유전자를 하나라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무조건 A형이 되므로 A형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은 모두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된다. 결과적으로 A형 유전자는 순식간에 개체군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문제는 전염병이 돌기 전 개체군에서 A형의 수가 굉장히 많은 경우다. 전염병에 강한 O형 유전자는 열성이기 때문에 다른 O형을 만나야만 혈액형을 O형으로 만든다. 그런데 O형을 두 개 물려받기가 힘들기 때문에 O형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혈액형은 A형으로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자연선택은 A형 뿐만 아니라 O형 유전자까지 같이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자연선택만으로 한 집단의 유전자를 한 종류로 완전히 갈아치우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는 진화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다른 힘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다른 힘'이 자연선택보다 더 강하게 진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 '다른 힘'은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회에 계속)
Posted by eupho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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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itiker 2005.12.13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감사합니다^^ 다른 힘이라면 화성침공이라도 될까요'')?

  2. 라임에이드 2005.12.13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앗; '다음 회에 계속'은 강하군요 -_-a

  3. intherye 2005.12.14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이요. "A형 유전자를 하나라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무조건 A형"이라고 하셨는데, AA, AO에다가 AB도 가능하니까, AB형이 나올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질병이 유전자의 표현형 네 가지에 다르게 반응하는 거라면, 혹시 이때 A형 유전자가 AB형에 숨어서 전달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혹시 전염병의 입장에서 ㅡ,.ㅡ; AB형을 A형과 B형의 교집합 정도로 보신 겁니까? 그러시더라도 표현에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듯해요~

    ※저도 보너스 상품 노리고 있습니다. ;)

  4. 2005.12.14 0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rtiker // 화성침공이라.. 그런 경우는 멸종이겠죠.. ^^
    라임에이드 // 네 그렇습니다. ㅋㅋ
    intherye // 잘 읽어보시면 "만약에 A형과 O형만 사는 나라"라고 되어있습니다. B형과 AB형은 성격이 나빠서 이미 멸종했다고 합니다. ㅋㅋ

  5. intherye 2005.12.14 0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하하 그랬군요. 민망하여라~

  6. 강규영 2005.12.14 0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소한 딴지: 종의 기원 5장 Laws of Variation 중 Effects of Use and Disuse에 보면 다윈도 용불용에 기반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용불용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I think there can be little doubt that use in our domestic animals strengthens and enlarges certain parts, and disuse diminishes them; and that such modifications are inherited. Under free nature, we can have no standard of comparison, by which to judge of the effects of long-continued use or disuse, for we know not the parent-forms; but many animals have structures which can be explained by the effects of disuse."

    See also http://en.wikipedia.org/wiki/Origin_of_Species

  7. 2005.12.14 1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intherye // ^^
    강규영 // 아, 그렇군요.

  8. 아물쇠딱 2005.12.22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강규영님께서 지적하신 건 옳지 않습니다. 다윈의 말을 오늘날 통용되는 개념과 함께 해석해보면, 쓸모없는 부분이 있는 개체는 비용적 측면에서 적응도(fitness)가 떨어지며, 반면에 유용한 부분이 있는 개체는 적응도가 평균 이상이므로,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후자가 더 많이 살아남으므로 겉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부분이 퇴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윈은 멘델의 유전법칙 이 전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유전 지식은 전무했습니다. 당시는 혼합이론(Blending Theory)이 받아들여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다윈은 뛰어난 통찰을 보여줍니다. 혼합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요.